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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수염 수술기(맹장염 수술기) #2 - 충수염 수술(맹장염 수술) 후 입원기 1

청춘이야기

by 발랄하고 우울한 청춘 2014. 6. 23.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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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수염 수술기(맹장염 수술기) #2

충수염 수술(맹장염 수술) 후 입원기

 

 

수술 한 당일은 몰랐다. 아직 마취의 기운이 남아있고, 잠깐잠깐만 꺠어있을 뿐 계속 잤기 때문에 아픔을 느낄 새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자고 일어난 다음날. 고통은 찾아왔다. 복강경으로 절개한 부분과, 개복한 부분, 그리고 노폐물을 뽑기 위해 관을 뽑은 부분의 약간의 통증과, 개복한 부위, 즉 충수(맹장)을 절제한 부위는 정말 칼로 찌른 후 후벼파는 듯한 고통이었다. 나름 고통은 잘 참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신음소리 나는 고통이 느껴졌다. 누워있을때는 그나마 아픔이 둔했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나도모르게 끙끙 앓고 있었다. 계속 누워있으면 등에 계속 땀이 차서 옆으로 잠깐 잠깐 움직여줘야 쾌적하게 누워있을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옆으로 움직일라 치면 배에 힘이 들어가고 내장이 쏠리는 느낌, 그리고 옆구리에 꽂은 관 떄문에 몸을 뒤척이는 것 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 고통을 경감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링거 중 하나인 고통경감링거의 버튼을 꾹 누르는 것이었다. 직접 링거로 꽂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진통제라고 하는데.... 꾹 누른 후 기다려도 고통이 가시지 않아 연속으로 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고통은 여전히 느껴졌다.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을때에는 간호사부에 연락하여 추가 진통제를 넣는 것이었다. 

 못먹는 것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링거도 맞고 있고, 속을 쓰리지 않게 하는 주사도 링거로 맞기 때문에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문제점은 물이었다. 수술 후 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는데, 목에 가래가 잔뜩 끼어서 좀 뱉고 싶은데, 몸 안에 수분이 없어서 그런지 가래 뱉기도 힘들고 워낙 기관지쪽이 약해서 그런지 숨쉬는데에도 불편했다. 물에 적신 거즈 같은 것을 입 위에 올리는 것을 처치라고 해주었으나, 물을 입에 머금고 뱉는 편이 더 좋다고 주변에서 일러주셔서 그렇게 했다. 물을 머금고 뱉는 편이 입안도 마르지 않고, 가래를 제거하는 데에도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더 설상가상인건 이렇게 아픈데 운동을 하란다. 링거를 건 링거대를 끌고 산책하란 소리다. 수술 후 다음날부터 걸으라니.. 일어나는 것도 혼자 못일어나서 누군가 부축해줘야 겨우 일어나는데? 하도 의사들이랑 간호사들이 운동하라고 잔소리를 해대서 수술 후 다음날 시도를 해봤다. 결론은 실패. 병실 나서는데 속이 메스꺼워져서 다시 누웠다. 제대로 된 산책은 수술 후 3일정도 지나서야 가능했다. 

 맹장수술(충수염수술) 후 가장 중요하다는 방귀. 방귀는 수술 후 다음날 바로 나왔다. 그래서 방귀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초조함은 없었는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대변은 엄두도 못내고, 소변조차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느낌이 난다기 보단, 방광에 소변이 차서 찌릿찌릿한 느낌이 난달까? 그래서 몸을 질질 끌고 화장실에 가서 앉으면 또 나오질 않았다. 수술 초기에는 소변과 대변양을 체크하는데, 계속 못갔다고 하니 한번은 강제로 소변줄을 꽂아 소변을 보고, 그래도 계속 소변을 못보자 결국 소변줄을 꽂고 배설되게 하였다. 내가 또 소변줄을 꽂을줄이야 ㅠ

 더더욱 큰 난관은 보호자의 부재였다. 아무래도 할머니 혼자 간병을 하시다보니, 너무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 집에 가셔서 쉬시라고 보내고나면 하아. 남자친구도 평일에는 일을 하기 때문에 보호자가 없는 시간들은 버둥거림의 시작이다. 일단 일어나는 것이 문제다. 침대의 각도를 올릴래도, 화장실을 갈래도, 씻으러 갈때도, 산책을 나갈래도 일단 내가 일어나야 뭔가 가능한대, 혼자 일어나려면 침대의 난간을 잡고 온갖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켜야 했다. 다행히 주변의 다른 환자분들이나 그분들의 보호자분들이 조금씩 조금씩 도와주셔서, 혼자 있는 시간을 그나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떄로는 눈물나도록 서럽기도 했다. 집안사정상 보호자가 할머니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런 내 처지가 비참했다.

 병실생활에서 심심함은 별로 느끼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하고, 독서도 하고,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예능이나 애니도 다운받아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실 TV는 보기 힘들었다. 커텐때문에 누워서는 티비가 잘 안보이는 것도 있고, 한분이 너무 예민해서 티비도 오래 못봤기 때문에 나는 누가 옆에 있을 때 빼곤 종일 스마트폰과 함께 했다.

 심심함보다 괴로웠던 것은 잠자리. 예민한 편이라 잡음이 들리면 잘 못자는데, 조금씩 코들을 고니 아아 5인실의 비애구나 ㅠㅠ. 스마트폰과 함께 늦게, 지쳐서 한새벽에 겨우 자면 새벽부터 오는 검사의 행렬. 새벽 6시에 피검사를 위해 주로 레지던트가 오는데, 후 레지던트들의 주사실력은 정말 엉망이었다. 가뜩이나 핏줄이 잘 안보이는 팔이라서 주로 손등의 핏줄에서 뽑았는데, 팔에서 뽑아보겠다고 한 곳에 서너번을 찌르는데 잠도 못잔 나에게는 정말 고역이었다. 그래 팔은 잘 안보이니까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왜 잘 보이는 손등에서도 몇번이나 찌르는거니. ㅠㅠ. 손등은 또 팔보다 더 아픈데 여러번 찌르니 링거 꽂은 아픔 + 주사의 아픔까지 더해져서 따끔한 아침이었다.

 

 회복기는 다음 글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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